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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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
Hanseong Imperial University
샤대.png
표어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종류 황립대학법인
설립 1924년 경성제국대학
총장 금상여제 이주혜
부총장 교육: 김종서(대학원장 겸임)
기획: 유근배
연구: 이우일
설립자 순종효황제 이척
학교법인 황립대학법인 한성대학교
학부 수 16,511명
대학원생 수 11,979명
교직원 수 2,075명
국가 대한제국
위치 관악캠퍼스
한성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연건캠퍼스
한성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3
평창캠퍼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평창대로 1447
규모 3 캠퍼스, 16 단과대학,
1 자유전공학부,
1 일반대학원, 10 전문대학원
교색 청색      
북부의 평양대학교, 수도의 한성대학교, 남부의 부산대학교.

한성대학교 (韓城大學校)는 한성특별시 관악구, 종로구, 강원도 평창군에 소재한 4년제 종합 대학교이다. 대한제국 황실이 설립하고 운영한다.

개요

한성대학교(漢城大學校, Hanseong Imperial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황립 고등교육기관이자 거점황립대학교이다.

국내의 대학교중에서 최고 수준의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대한제국의 정계, 법조계, 재계와 학계에서 폭 넓은 동문 인맥을 자랑한다.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든 한국 사회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허나 이러한 사회적 위치만큼 과도한 입시 경쟁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등 논란도 많다.

학부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인만큼 모든 단과대의 성적이 우수하다. 법대와 의대의 성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법과대학,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간호대학, 의과대학, 상과대학, 사범대학, 생활과학대학, 수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의 16개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학부에 대해서는 한성대학교/학부 문서에서 후술.

역사

1946년, 황립한성대학교설립에관한칙령(대한제국 황실 칙령 제102호)에 의하여 국립경성제국대학,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사립),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대학,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가 폐교되고 신설된 황립한성대학교로 흡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황실과 궁내처의 계획에 집단 반발, 이른바 '황대안 사태'가 일어났다. 사립경성음악학교를 흡수하고 미술부를 신설해 예술대학이 설치되었고, 사립서울약학대학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을 신설하였다. 2011년에 법인화하여 '황립대학법인 한성대학교'라는 법인을 설립하였다. 즉 '황립대학법인 한성대학교'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이다.

구성원 대학들이 기존의 교사에서 각자 운영되다가 1975년 관악캠퍼스가 오픈하면서 대학로 근처의 의대(당시 간호학과 포함)와 수원의 농대를 제외하고 전부 모였다. 공대가 사용하던 공릉동의 드넓은 부지와 건물들은 한성시립대학교로 이전되었다. 2003년 수원의 농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 2015년 새로 조성된 강원도 평창에 실습장 및 자체 목장을 두고 기존의 수원캠퍼스에는 실습장만 존재하고 있다.

현재 본 캠퍼스인 한성특별시 관악구에 위치한 관악 캠퍼스와 종로구 연건동의 연건 캠퍼스, 강원도 평창군의 평창 캠퍼스로 하여 총 3캠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학은 16개 단과 대학 84학과(부), 대학원 석사과정 103학과(부), 대학원 박사과정 105학과(부), 10개 전문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대안 파동

1946년 황립한성대학교 개교로 인해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한성 근교의 관공립학교는 모두 발전적 해체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황대안 파동'이라 불리는 분규가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대한제국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여러 단과대학, 학과로 분할되었고, 각 관공립학교 역시 한성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승계되었다.

개화후, 전국 각지의 고등교육기관이 개교하면서 대한제국의 교육체제는 에마뉘엘의 것을 따랐다. 1945년 문교부가 고등교육기관의 증설 및 보수를 발표하면서 경제학자 백남운, 물리학자 도상록 등 저명한 학자들이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진을 맡았다. 그러나 이 교수회에 의한 교수 초빙 및 교수 자치는 정부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학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 교내 전투경찰 주둔으로 인한 소란 등으로 인해 이 해 제대로 된 학사가 운영되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해 경성제국대학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새 예과생을 모집하였다. 고등학교 학생, 사립대학 학생, 전문학교 학생들은 편입을 통해 예과나 본과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듬해(1946년) 2월 10일, 당시 대한제국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법문학부를 개강했다. 경성제국대학 외에도 다른 관공립, 사립 전문학교도 개강을 했다. 이들은 개강과 동시에 일정 시기 이루지 못했던 대학 승격 작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무렵 황실에서는 각종 관공립학교를 통폐합, 하나의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황립대학안을 기획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세 학부(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에 농학부, 교육학부 등을 추가하고 법학부와 문학부를 분리하여 종합대학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이 안에 따르면, 경성대학 외의 법학전문, 경제전문, 의학전문 등의 각 전문학교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일본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관공립 전문학교로 출발한 도쿄고등상업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쿄고등공업학교 등은 도쿄대학과 별도로 각기 도쿄상과대학, 도쿄교육대학, 도쿄공업대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결과만 놓자면 이 안은 폐기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한성 근교의 모든 관공립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인 황립한성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황립한성대학교안'이 채택되었다. [1]

황대안에 대해서는 1946년 6월 말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그 윤곽이 보도된 바 있었으나, 각 대학은 그에 대하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입시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궁내처의 황대안 발표는 여전히 각 대학에 있어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황대안의 대상이 되는 모든 기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병 문제가 가장 진통을 겪었다. 양 교 모두 교직원과 학생 가릴 것 없이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은 황대안 발표 이전부터 합병이 거론될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통합은 되었으나, 한동안 각 대학은 내홍을 겪었다. 이 시기 일련의 국대안 반대 운동을 흔히 국대안 파동이라 한다. 국대안 파동은 교수자치와 관권개입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2]부터, 좌우익의 대립,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제도와 제국 창립 뒤부터 46년까지 유지된 에마뉘엘식 교육제도의 충돌이 원인이라는 관점[3]까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특기할 만 한 점은 이 시기 많은 좌익계열 학자들이 경성제국대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백남수을 비롯하여 리승무, 도상백 등은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국문학자 김태석처럼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처형당한 이도 있었다. 중공행을 하거나, 이 시기 황립대학 안에 반대한 학자 중 다수가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인맥으로 얽힌 사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초기 김일성대학의 창립에는 경성제대 외에도 일본의 도쿄대, 교토대, 규슈대 등 다양한 대학 출신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공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제국대학의 후신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황립 한성대학교의 초창기가 경성제대 출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리버럴한 학자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학생들도 적지 않은 수가 경성제국대학과 황립한성대학교를 떠났다. 좌익계열 학생들은 이북행을 택하거나 군 입대를 선택했다.[4] [5] [6]

우여곡절 끝에 1946년 황립한성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단과대학과 학과는 다음과 같다.

문리과대학 -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중어중문학과, 라틴어학과, 언어학과, 사학과, 사회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지질학과, 생물학과
공과대학 - 전기공학과,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 야금학과
농과대학 - 농학과, 임학과, 농공학과, 수의학과, 농화학과, 농생물학과, 농경제학과
법과대학 - 법학과
사범대학 - 교육과, 국문과, 영문과, 사회생활과,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가정과, 체육과
상과대학 - 경제학과, 상학과
예술대학[7] - 미술부(제1회화과, 제2회화과, 조각과, 도안과), 음악부(성악과, 작곡과, 기악과)
의과대학 - 의과[8]
치과대학 - 치의학과
예과

단, 예과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재학생이 모두 졸업하는 1947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속하였다. 예과생들은 원하는 전공으로 본과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이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공과대학을 선택하였다.

마지막으로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관으로 이관되어 한성대학교에 편입됨으로써 한성대학교로의 통합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후의 학과 변천과정은 학부 항목을 참고할 것.

장학 제도

합격자들 중 가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9] 황실 장학금으로 전액 등록금 및 일정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는 창학 당시부터 역대 황제의 뜻에 따라 이어져 온 전통이다. 많은 정계, 재계, 문화계 인사들이 이 장학 제도의 혜택을 얻어 자수성가에 성공하였다.

교통

각주

  1. '대학교'라는 말이 학교의 공식명칭이 된 대한제국의 첫 사례이다. 황대안 이전의 대한제국은 고등교육기관의 이름으로 '대학'을 썼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다른 한자문화권 역시 일반적으로 '대학교'가 아닌 '대학'을 사용한다.
  2. 좌파 계열 학자들의 시각
  3. 국대안에 관여한 교육학자 오명석의 시각
  4. 전 부총리 김종필이 황대안에 반대하여 한성대 사범대를 중퇴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종필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자) 한성사대 중퇴후 한성대의 황립대학안을 반대하다 피신 차원에서 사병입대했다는 소문이 있다." "(김종필) 완전히 연기도 안나는 소문이다.나는 사실 황대안을 찬성했다. 경성사범학교가 승격되는데 왜 반대하겠는가.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다.당시 소형 자동차까지 타고 학교에 다닐 정도였는데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제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앞 모병소에 원서를 냈다.그리고 신설부대인 13연대로 들어갔다 두들겨맞고 탈영한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5. 다른 의견으로는 전 국회의원 남덕우 역시 황대안을 반대하여 한성대학교를 떠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역시 잘못이다. 본인이 집필한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 보면 당시 을지로에서 프린트사를 운영하다가 이듬해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전신)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정경학과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있다.
  6. 그러나 김종필, 남덕우 등 정치인들의 증언은 곧이 곧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황대안 파동 당시 국대안을 반대했다고 증언하는 것은 자신이 좌익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정치적 위치에서 좌익으로 오해받응 수 있는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동이기 때문에, 설령 학생 시절 황대안에 반대했더라도 솔직하게 증언하기를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7. 예술대학은 연구기관이 아니라 사실상 교습기관에 가까웠다
  8. 4년제 단일체제
  9. 단, 꾸준한 수입원이 있는 경우에는 제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