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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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일본
Flag of Japan.png Taisei Yokusankai.png
국기 국장
국가 기미가요
Japan on the globe (de-facto) (Japan centered).png
수도 도쿄도
정치
공용어 일본어
천황 헤이세이
내각총리대신 카토 메구미
역사
정부수립  
 • 일본제국 선포 1804년
 • 일본정부 수립 1945년
 • 제2일본제국 합병 1951년
지리
면적 377,944km² (61 위)
내수면 비율 0.8%
시간대 UTC (UTC+9)
인구
2016년 어림 217,247,384명 (6위)
경제
GDP(PPP) 2016년 어림값
 • 전체 171,568억$ (2위)
 • 일인당 80,864$ (2위)
명목 1,755,630,090,576$ (2위)
HDI 0.929 (1위, 2016년 조사)

일본국(日本國, 일본어: 日本国 (にほんこく) 니혼코쿠[*], にっぽんこく 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일본어: 日本 (にほん) 니혼[*], にっぽん 닛폰[*])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국토는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으로 이루어진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를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37만 7835㎢인데 이는 노르웨이보다 작으며 독일보다 크다. 면적 순으로는 세계 61위다.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이며 이 중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등 네 곳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2억 1,9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사실상의 수도인 도쿄 도를 둘러싼 들(가나가와 현, 사이타마 현, 지바 현, 이바라키 현, 도치기 현, 군마 현)을 포함하는 수도권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스 형태로 이 지역에만 약 9,00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5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일본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아키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성장당이며 총리카토 메구미이다.

경제력은 2016년 기준 명목,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세계에서 첫 번째로 크다.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출이 많으며 세 번째로 수입이 많은 나라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부터 25 년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내 총생산이 높았으며, 2016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되었다.

역사

일본 총감독 시대

닌자대전

일본 총독 시대

겐다 마쓰라 시대

겐다 파벌의 대표자인 겐다 마쓰라(源田 松浦 : 생몰 1674-1748)는 일본의 전면적인 개혁을 촉구하며 일본총독시대(1720~1804)를 열었다. 일본총독부는 입법부와 집행부의 2권분립을 하였다. 입법부인 일본민회가 생겨났으며, 일본민회에서만 법률안을 제정하는 입법의 독점권을 가졌다. 일본민회는 총원 59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개혁연합(급진개혁)'과 '동일본연맹(보수주의)'이 양당체제를 갖추었다. 집행부의 장을 일본총독이라고 부르는데, 이 일본 총독은 일본국민의 투표로써 선출되었다. 임기는 6년으로써 매우 긴 편이었으며, 급진개혁의 필요성을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문화가 이 때 생겨났다.

1720년 초대 일본총독으로 겐다 마쓰라(재임 1720~1732)가 선출되었다. 겐다 마쓰라는 여러가지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가장 먼저 일본의 교육을 정비하였다. 일본 총교육법(1721)을 발표하여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이를 국립화·의무화하였다. 그리고 도쿄중앙대학(도쿄제국대학, 도쿄대학)을 설립하여 최상위 고등교육을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과학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여 일본과학대학을 설립(1722)하였다. 하지만 동일본연맹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과학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는 마쓰라 총독을 비난하였다. 또한 토지 소유법(1722)을 동일본연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전 일본 국민이 각자 소농이 되도록 하였으며, 군사적인 면에서는 지역방위해체령(1722)를 발효하여 봉건적 전재였던 농촌단위 방위체제를 혁파하고 중앙 상비군 체제를 갖추어 일본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있던 봉건적 사회질서를 완전히 철폐하였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문집·시집·소설·극의 검열을 철폐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1726). 1735년에는 겐다 마쓰라의 이런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겐다 문학대상을 매년 수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조선과 조선출병전쟁(1592~1598)이후 단절된 국교를 정식으로 회복하는 외교대사를 파견하였으며(1727), 에도의 명칭을 도쿄로 바꾸어 완전한 수도의 이전을 천명하였다(1728). 1720년대 후반에는 제1회 전국과학경진대회에서 있었던 아타리 쇼크(1726)로 일본과학대학에서 운동에너지와 열에너지에 관한 연구 붐이 일어났다. 1729년에는 청나라에서 상업 활동을 전개하던 하시모토 아키라(1699~1776)는 청나라에서 나는 석탄이 기존의 목탄보다 훨씬 더 잘 타오르는 것을 일본과학대학에 보고하였다. 이에 과학대학에서는 카토 토모야(1702~1789) 박사를 중심으로한 연구단을 청나라에 파견에 연구·조사토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는 운영자금이 모자라 기숙사를 4년간 폐쇄할 정도로 일본과학대학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다. 결국 1738년 카토 연구단은 회전식 증기기관의 이론과 원리를 발명, 이를 토대로 제작하여 일본과학대학에 보고하였다. 이후 회전증기기관은 일본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근대화로 열강과 어깨를 나누다

1738년의 실험적 회전증기기관의 발명 이후로 이에 대한 연구는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적 관심을 한몸에 받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아베 아키유키(재임 : 1732~1744)는 산업과의 접목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곧 일본국유철도의 시작이었다. 1740년 설립된 일본국유철도는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도쿄-나나와(오사카)에 이르는 최초의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1760년대에는 국민적 관심이 쏠려 철도에 관한 의견이 양분되기도 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표준궤 역설사건(1435합의, 1757)으로써 집행부 내의 공무원들은 1067mm를 지지하고, 각 부의 장들은 1495mm를 지지하는 것으로 업무를 7일이나 보이콧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국민적 관심과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었으나, 은퇴한 초대 일본국유철도국 국장이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던진 '그럴꺼면 그냥 1435로 해'라는 한 마디가 신문에 나오면서 1435mm로 국민적 여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일본의 철도는 1435mm를 표준궤로하는 철도가 전국적으로 부설되었다.

1760년대에는 노다 신이치(재임 : 1762~1780)의 주도로 대영제국(1762), 프랑스제국(1767), 프로이센 왕국(1769), 네덜란드(1770), 벨기에(1771), 스페인(1775)와 공식적인 수교를 체결하였으며, 각 국에 외교대사를 파견하고 대사관을 건립하였다. 1777년에는 신생국가인 미국과 미일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경제적, 정치적 협력을 꾀하였다. 또한 노다 신이치는 군의 근대화를 촉진하여 1770년대 말에는 청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다. 1780년대에는 수도권역 인구의 폭증으로 교통난과 주택난, 인프라의 부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카토 쿄코(재임 : 1780~1788)는 이러한 국민의 요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고, 결정적으로 후생집행부 장관의 후미토모 발언(1787) 때문에 전국적 시위를 불러오자 1788년 이에 책임을 물어 사퇴하였다. 후에 후미토모 발언은 1798년에 발표된 맬서스의 인구론에 인용되기도 하는 치욕을 겪었다.

1790년대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영국을 도와 대프동맹에 명목상으로 참여하여 군수품을 판매하거나, 프랑스가 기회를 노리는 베트남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면서 군수산업을 비롯한 중공업이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1792년에는 일본 최초의 야하타 제철소가 준공되었다. 1840년대에 이 제철소는 영국의 철강생산량과 맞먹는 철강을 생산하게된다. 또한 1794년부터 철도의 레일이 초기 강철로 바뀌어 철도 교통의 안전성을 높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바탕으로 1800년에는 오키나와 문제로 청나라와 식민지 분쟁을 치룬다(오키나와 분쟁). 이 소규모 국지전에서 청나라를 압도적으로 이긴 대가로 일청무역조약을 체결하여 석탄의 향후 50년 간의 독점적 채굴권을 인정받고 일본 상인의 청나라 진출을 10년 갱신으로 허용받았다. 그러나 1803년, 청나라는 돌연 계약을 파기하고 오키나와를 급습하여 무력으로 점거하였으며, 석탄 광산을 불법적으로 폐쇄하면서 일본 대사관을 기습하였다.

일본의 역사
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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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일청전쟁

카스미가오카 노구치(재임 : 1798~1804)는 청의 비문명적인 태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제1차 일청전쟁 : 1803.07.13 ~ 1804.04.05). 일본은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청의 구식함대를 격파하였다. 특히 우에카이해전(上海海戰 : 1804.02.06)에서 대승함으로써 청의 해군을 무력화시켰다. 이후에도 청나라는 중화사상에 젖어 일본이 결국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적은 수의 병력만 보내는 등 전쟁에 안이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모든 생산력과 과학력, 인력을 집대성한 총력전의 상황이었다. 일본은 청의 해군이 무력화되어 해상장악력을 상실한 틈을 타 즉각 톈진과 상하에 일본군을 상륙시켰으며, 청나라의 미온적 대처와 전근대적 육군교리로 전투에 임하는 청나라의 후진적 군대는 일본군 상륙 1개월만에 베이징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청나라는 일본에게 패배한 대가로 굴욕적인 일청북경화친조약(1804.04.05)을 체결하며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일본은 일청북경화친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의 원명원에서 일본 천황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일본 제국이 성립되었다.

일본 제국 시대

제국 시대와 세계 열강 반열로의 진입

일본제국 시대(1804~1945)일청북경화친조약을 발판으로 막을 올렸다. 카스미가오카 노구치의 강력한 개혁의지와 당시 도쿄중앙대학의 교수들의 삼권분립론이 맞물리며 삼권분립을 기초로하는 내각책임제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 체제에서 내각의 수반은 내각총리대신으로써 정해진 임기가 없고, 일본의회의 의원선거시 다수당의 총수가 내각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 원칙이나, 다수당이 용인할 경우 총리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은 일본제국 성립의 주도자인 카스미가오카 노구치(재임 1804~1808)로써, 삼권분립과 일본 산업의 육성에 집중하였다.

1804년 제국 원년에는 일본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옌화를 폐지하여 엔화제도를 구축하였다. 또한 일본 국립은행을 설립하여 전국단위로 설치하는 등 자금력의 확보와 물가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806년에는 도쿄에서 오사카에 이르는 산업지대의 조성에 주력하였으며, 가고시마와 구마모토에 대형 항구를 건설하고 요코하마항을 다섯배 확장하는 등 전체적인 해상인프라 확충하는데 힘썼다. 1807년 부터는 조선 통신사의 방일시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비용부담을 일본이 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한양에 일본제국대사관을 건립하였고 당해에 일조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부속 조약으로 일조무역조약과 조선광산개발협력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제제하던 상업활동이 일본상인들에 의해 부산항과 인천항, 원산항에서 이루어졌으며, 광산개발협력조약으로 조선의 금광과 철광석채굴에 한층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대신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도와주기로 약속하였다. 1808년에는 영국의 자문을 받아 일본 최초의 주식거래소인 전일본주식회사(全日本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전일본주식회사의 출범과 함께 상장된 기업에는 당시 선두주자였던 야하타 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 도요타 등의 225개 기업이었다. 현재 주가를 닛케이 225지수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카스미가오카 노구치는 임기를 마치고 1808년 5월에 퇴임하려 하였으나, 의회의 연임요구로 4년을 더 총리로써 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임을 축하하는 비공식 술자리에서 7.27사태(1808)의 발생으로 카스미가오카 노구치가 급서하였다. 7.27 사태를 일으킨 아야무라 노부히로 건설대신은 처음에 신보 츄오 부총리에게 월권을 행사하는 기무대신 타테구치 후미하를 저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럼에도 신보 츄오는 농담으로 받아들여 연임 축하연에 기무대신과 건설대신을 모두 참여시켰고, 결과적으로 아야무라 건설대신이 쏜 총에 타테구치와 카스미가오카가 사망하였다. 이후 비상정국으로 돌아서면서 신보 츄오 부총리가 긴급히 내각총리대신 직을 대리 수행하였다. 이후 1808년 8월 의회의 승인으로 공식적으로 총리가 되었으며 간토에 한정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관에는 사쿠라다 오미야, 합동수사본부장에는 기무성 정무차관인 사카모토 나오타리가 임명되었다. 이후 수사 도중에 사쿠라다 오미야 계엄사령관이 사건 발생일인 7월 27일에 신보 츄오 부총리와 함께 비공식 술자리가 있었던 현장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사카모토 나오타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사쿠라다 계엄사령관을 긴급체포하고 신보 총리를 꼭두각시화한다(12.31군사반란).

동아시아의 패자

1820년대 후반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두드러지게 확장하였으며, 도쿄에 조선소만 8개를 가지고있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830년대에는 산업과 상업을 규제하는 법률을 철폐하였다. 1860년대 초, 조선에서는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내정이 위태롭고 향촌질서가 붕괴하고있었으며 농민들이 일본 제국대사관을 습격하거나 일본 상인을 살인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사와무라 아키유키(沢村 昭之 : 재임 1858~1866)는 조선에 2천의 병력을 파견하여 농민반란을 진압하여주었으며, 부산과 울산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으로 사망한 자국민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조선은 1863년, 일본군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일본은 자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7월 조선이 정규군 1만 8천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강제로 몰아내려하였으며, 일본대사관을 포위하는 등 외교적 갈등이 심각해졌다. 결국 1864년 일본군은 보병 1만, 기병 2천을 부산포에 상륙시키고, 8척의 통상파괴선으로 인천항과 원산항을 포위하였다. 인천항에서 포병 4개 여단이 상륙하여 조선의 수도 경복궁을 포위한 후에야 조선은 9월 사과서한과 사절단을 보냈다(일조긴장 1864).

1876년에는 청나라의 상하이를 조차지하고 1881년에는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여 주었으며, 발전국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며 전근대적인 조선의 내정을 도우는데 조력하였으나 조선은 이토 히로부미를 미행, 감금하는 등의 작태를 보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일본 대사관을 포위하고 부산항을 폐쇄하는 등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며 결정적으로 9월 4일 일본의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의 대포가 공격하여 일본 해병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운요호사건). 이에 1886년,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 재임 1885~1888)는 2월 조선에 선전포고하고 5월에 한양을 점거하였다. 고종은 체포되어 영빈관에 감금되었다. 일본의 목표는 조선의 병합이었으나, 러시아와 청나라, 프랑스 3국의 간섭으로 조선병합 요구를 철회하였다(제1차 3국간섭 1886). 1887년 12월 조선과 일본의 평화협정이 청나라, 프랑스, 러시아의 외교대사들이 보는 가운데서 체결되었다. 일조평화조약(1887)은 조선의 배상금 지불이라는 항목이 없어 전 국민적인 반발을 불러왔고, 프랑스와 러시아의 강요로 일본이 더이상 조선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에게 사전에 통보해야한다는 조항이 있었음이 이듬해에 드러나자 도쿄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책임을 물어 이토 히로부미가 1888년 내각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그러던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반란이 일어나 조선의 민씨정권이 청나라에 진압을 요구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일조평화조약의 약문대로 일본에 통보하였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보다 빠르게 보병 2만과 포병 8개 여단, 8천 기병을 인천항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일본의 내항에 놀라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청나라와 일본군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 재임 1892~1900)는 아산항에 집결한 청나라의 군대를 급습하고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다(제2차 일청전쟁:1894.6~1895.4). 당시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추진하여 그 성과를 입증하려하고있었다. 그러나, 북양함대와 남양함대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일청전쟁에서 일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제2차 일청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이 배상금으로 더더욱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또한 이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일본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는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의 반환에 압력을 가했다(제2차 3국간섭).

제2차 일러 전쟁

이후 러시아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 제국의 경쟁은 조선에게 있어서 잠시의 자유를 주었고, 이것은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일조하였다. 그와중에 청나라에서 의화단운동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주청러시아인의 안전보장을 이유로 청나라에 군을 파견하였고 이것은 영국과 독일, 미국의 반감을 사며 일본을 러시아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키워주게 되었다. 이런 대립과 견제사이에서도 러시아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뛰어난 작전으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1905년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다. 포츠머스 조약에는 또다시 일조평화조약 때와 같이 배상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전국적인 폭동을 불러왔다. 이에 1906년 가쓰다 다로 총리가 사임한다. 1910년에는 조선이 병합된다.

제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장 집권한 제36, 41대 총리 카스미가오카 안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에 일본은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이 조차지한 웨이하이를 점령하였다. 1916년에는 192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발생해 수출이 구조가 붕괴하고 일본 경제를 파국으로 치닫게하였다. 카스미가오카 안도(霞ヶ丘 安藤 : 1차 재임 1920~1925) 내각총리대신은 조선의 상품시장화를 촉진하였다. 1910년대의 자치적인 조선지배정책을 철회하고 일본 직접통치를 채택하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 1921~1945) 정책과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인에게 일본인이라는 국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조선시장봉쇄령을 통해 조선시장에 외국 상품의 유입을 막았다. 또한 과거 조차지한 상하이에도 내상일체(內上一體 : 1924~1945)를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1천 5백 만)과 상하이(1천 만)라는 매우 작은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을 계속 생산하려면 식민지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다.

1925년 중의원은 경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카스미가오카 안도를 퇴임시키고 다른 여러 총리를 취임시키나 일본의 경제상황은 나빠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30년 대정익찬회가 처음으로 의회에 입성하여 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를 배출하였다. 결국 중의원은 카스미가오카 안도(2차 재임 1931~1938)를 다시 총리로 선출한다(1931). 일본은 적극적으로 팽창정책을 펼쳐 1931년에는 만주를 합병하고, 1932년 이후에는 산서성군벌, 서북군벌, 몽강군벌, 광서성군벌, 운남군벌을 뒤에서 지원하여 중국의 분열을 성공시켰다. 또한 산서성 군벌과 봉천군벌(만주국), 몽강군벌, 서북군벌을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식민지 시장으로써 삼을 수 있었다. 일본은 군비확장과 식민지 시장의 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그러나 1939년 대정익찬회는 돌연 자유민주당 총리들에 대한 인준을 거부하고 대정익찬회 출신 총리를 뽑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일본이 전면전의 소용돌이로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정익찬회는 본래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일본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소위 이상을 역임한 장교들이 만든 정치단체이다. 이들은 경제나 정치에 무지하였으며, 오직 군만을 파악하고 있었다. 1939년에 고노에 후미마로 대정익찬회 총리는 중화민국에 전쟁을 선포하며 유화적이었던 광서성 군벌과 운남군벌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1941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일본 제국의 붕괴를 앞당겼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이 항복선언을 함으로써 일본 제국이 붕괴하게된다.

전후 일본 시대

조선전쟁과 도쿄 선언

1945년 종전조서를 통해 전쟁을 끝낸 일본은 이제 연합국과의 기나긴 평화협상에 돌입한다. 쇼와 천황과 구 내각 관료, 군 장성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1951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평화협상의 주된 주제는 제2일본제국을 어떻게 항복시켜 이 회담에 끌어오느냐였다. 그러나 전쟁 내각을 수행하던 사람들과 미국의 협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제2일본제국이 건재한 항공모함과 제공권의 우위를 바탕으로 연합군의 진주를 격퇴하였으며 가장 큰 조력자일 것으로 예상되었던 소련이 대일전 승리선언으로 전선에서 물러나자 결국 1950년 초까지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 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조선 전쟁으로 미국은 더이상 제2일본제국과의 무의미한 상륙전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제2일본제국이 자본주의 국가로써 자유민주주의를 갖추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게된 것이다. 이 기회를 잡아 카스미가오카 안도는 1950년 7월 평화협상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며, 미국과의 물밑 접촉을 통해 서로의 협상안을 재확인하고 제2일본제국에 직접 방문하여 항복을 권유하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이 제안을 수용한 1951년 8월 15일, 비로소 태평양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날 도쿄에서는 일본 측 카스미가오카 안도, 제2일본제국 측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 측 더글러스 맥아더도쿄 선언을 발표하며 전쟁의 끝을 알렸다.

일본과 그 휘하의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이번 전쟁을 다음과 같이 끝내는데 합의하였다.
제1조 일본은 미국과 그 동맹국이 지정한 전쟁 최고책임자 도조 히데키 및 고노에 후미마로를 극동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제2조 일본은 미국과 그 동맹국이 지정한 전쟁 최고침략함 항공모함 아카키, 카가와 전함 나가토, 무츠 그리고 야마토를 미국의 공해상에서 수장한다.
제3조 제2일본제국은 전쟁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무정부기간동안의 동남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위해 그 경찰력을 용인한다.
제4조 일본과 미국은 앞으로 동등한 동맹국으로써 서로의 이익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협력한다.
제5조 극동군사재판의 판사에는 미국과 중화민국, 영국, 호주, 프랑스 출신으로 각각 1명을 배정하며 검사에는 미국과 영국에 각각 2명, 소련과 중화민국, 호주, 프랑스에 각각 1명씩을 배정한다.
제6조 극동군사재판에서 일본측 피고는 일본측 변호인이 변호할 수 있으며, 변호의 내용은 법정에서 편견없이 최대한 엄정하게 심사한다.
제7조 일본은 이전과 같이 국가로써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55년 체제

민주 3년천하

KM전쟁과 현재

정치

일본의 정치 체제는 군주인 천황과 헌법이 양립하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일본 국민들의 총의(總意)에 바탕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내각의 조언과 승인, 책임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총리와 내각의 임원들을 임명하거나 그 신임장에 인증하는 것,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하는 것, 국회를 소집하고 헌법 개정과 법률 및 정령, 조약을 공포하는 것 등으로 일본 천황이 국사에 관여하는 것은 크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천황은 외교의례 상에서 일본의 국가 원수로 대우받고 있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아키히토이며 1989년 즉위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법 기관인 국회는 헌법에서 명시된 국권의 최고 기관이자 나라의 유일한 입법 기관으로써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중의원의 내각 신임과 불신임의 의결권을 가진다. 하지만 2016년의 개헌으로 총리의 지명권한이 박탈되고 총리후보 지명권한이 새로 부여되어, 지명된 두명의 후보를 다시 한번 선거인단 투표에 회부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 및 참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원은 전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국회는 1948년 이후 1993년부터 1996년까지의 연정 기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당이 계속해서 여당의 자리에 있었으나 2009년 9월 15일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시작되면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12년 12월 16일에 실시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여당의 자리를 탈환하였다.

정당과 선거

일본은 1804년 일본 제국 헌법의 발효부터 시작된 의원내각제에서 부터 진보계열 정당이 드물었다. 1804년 집권한 입헌자유당을 시작으로 차례로 정권을 잡은 입헌정우회, 입헌동지회, 선진자유당, 선진민주당, 민주당(1800년대), 자유민주당, 대정익찬회, 공명당, 신생당은 모두 보수이거나 반동주의, 파시스트 정당이었다. 진보성향 정당이 집권한 것은 일본 의원내각제식 의회민주주의 213년 역사에서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의 민주당 4년 정권이 끝이다.

외교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의 대외 관계는 도쿄 선언(1951년) 및 각국과의 배상·보상조약을 거쳐 재구축된 것이다.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동맹을 기축으로 하여 서방 각 국가들과 긴밀한 제휴를 해 가면서 반공주의, 경제중심주의 외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유엔을 지원함으로써 평화로운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패전 이후, 1951년까지 주권을 상실하여 외교 자주권을 갖지 못하여 점령 기간 동안 점령국인 미국의 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대외 정책이 실시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 각국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일본 총독시대 이후에는 서양을 비롯해 세계 각국과 국교를 텄다. 일본은 전 세계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데 현재 일본은 맹방인 미국과의 외교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참조). 태평양 전쟁 이후 체결된 조약에 따라 일본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2006년까지 미국은 일본의 최대교역국이었다.

지방과 행정구역

경제

1738년 이후 일본은 과학혁명을 토대로 산업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산업이 성장한 것은 50년 뒤이다. 1790년대 야하타 제철소가 준공되면서, 제1차 일청전쟁을 승리하고 제국 시대가 열린 당시 카스미가오카 노구치 총리는 자유 시장 경제와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시대에 일본인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을 고용하여 합리화된 경제 형태를 습득하였으며 오늘날 일본 유수의 기업들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아시아에서 경제가 가장 빨리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화 된 경제를 빠른 속도로 회복함과 동시에 경제 규모가 크게 성장하였는데, 1960년대에는 13%, 1970년대에는 10%, 1980년대에는 7%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빠른 성장 기조는 1990년대에 이르러 둔화되었으며 부동산 가격에 낀 과도한 거품이 1989년을 정점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이에 따른 후유증으로 10년 이상의 오랜 불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불황세는 정부의 노력으로 2000년 직전에 잠시 회복되었다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다시 침체되었다. 이후 다시 성장국면으로 돌아서고 대미명예회복전쟁으로 몇 년간 7~8%의 고도 성장을 이룩하였다.

일본의 산업 체계는 주로 공업과 서비스업이 중심으로 은행업, 부동산, 유통업, 교통업, 통신업, 건설업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일본은 대규모 산업 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 가전 제품, 철강, 비철금속, 선박, 화학 물질, 섬유 및 가공 식품 등이다. 또한 서비스업이 일본 연간 총생산량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2016년을 기준으로 일본 총 인구의 약 1억 3,700만명이 노동자이며 실업률은 3%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또한 일본의 노동시간 대비 1인당 국민 소득은 2016년 기준 세계 2위로, 이는 빅맥 지수가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일본의 기업으로는 토요타혼다, 닌텐도, 소니, 신일본제철, 도시바미쓰비시 등이 있다.

일본은 2016년 세계 기업환경평가에서 178개국 중 2위를 차지하였고, 국내총생산비 세율 또한 낮다. 이러한 형태의 일본식 자본주의는 여느 자본주의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게이레쓰(系列) 형태의 기업, 즉 재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긴 고용 기간과 직장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를 기준으로 인사를 정하는 연공서열제 또한 전형적인 일본의 노동 환경이다. 일본의 기업들은 일명 ‘토요타 웨이’라는 경영 이념을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주들이 경영의 주체가 되는 주주 행동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들은 흔치 않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이러한 전통적인 경향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일본은 자유방임주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하여 경제자유지수에 의하면 일본 경제는 아시아 30개국의 경제 중에서 5번째로 자유방임주의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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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 프리우스. 자동차와 전자 기기는 일본의 수출액 중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교통

일본의 교통의 특색은 육상·해상·항공을 막론하고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여객 및 화물의 수송이 특히 활발하며 이어 세토 내해·북규슈 지방에서 발달하고 있으나, 동해 쪽이라든가 홋카이도·도호쿠의 두 지방, 시코쿠규슈 남부의 교통은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또한 하천 교통이 거의 없는 것이 결점이며 태풍이나 대설 혹은 지진에 의한 교통 장애도 적지 않으나 전체적인 교통망의 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여객 수송 수단으로 수송량이 가장 많은 것은 자동차이며 그 다음이 철도이다. 반면 항공기선박이 국내 수송을 차지하는 비율은 적다. 1970년대에는 철도 수송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1990년대 이후 버스를 포함한 자동차 수송이 전체 국내 수송의 5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 오염 문제와 더불어 철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증대하고 있다. 화물 수송량은 트럭을 포함한 자동차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선박과 항공기, 철도가 그 뒤를 이었다.

과학과 기술

일본은 과학 연구 분야를 선도하는 나라 중 하나로, 특히 기술, 기계, 생물학 연구에서 앞서가고 있다. 칠십만명에 가까운 연구자들이 일천삼백억 미국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나눠쓰고 있으며 이러한 예산규모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것이다. 일본은 기초 과학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리더이기도 해서 물리학과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 명의 필즈상 수상자와 한 명의 가우스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일본의 탁월한 기술 분야의 기여는 전자 공학, 자동차, 기계, 지진 공학, 산업 로봇, 광학, 화학 물질, 반도체, 금속 등의 분야에서 나타났다. 일본은 로봇 공학 분야에서 생산과 소비 모두 세계적인 리더의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전 세계에서 제조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산업 로봇 중 절반 이상(742,500개 중 402,200개)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며 QRIO, ASIMO, AIBO 같은 로봇들을 제작하였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기준으로 뽑은 열 다섯 개 자동차 제조사 중 네 곳의 본사가 있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기준으로 뽑은 스무개의 반도체 판매사 중 일곱 곳이 있는 나라이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일본의 우주기관으로 우주와 행성 연구를 감독하고, 항공기 산업과 로켓과 위성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이 기구는 국제 우주정거장에 참여하고 있으며 일본 실험 모듈을 국제우주정거장에 추가하였다. JAXA는 금성 기후 탐사 인공위성(PLANET-C)을 2010년에 쏘아올리는 것과 같은 우주 탐험 계획을 갖고 있다. 또한 JAXA는 2013년에 수성탐사위성을 쏘아올리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2030년에는 달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JAXA는 2007년 9월 14일에 달 탐사 위성인 셀레네(SELENE, 일본어: かぐや 가구야/카구야[*])를 발사했다. 셀레네는 미국아폴로 계획 이후에 가장 큰 규모의 달 탐사 계획이다. 이 계획의 목표는 달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다. 위성은 2007년 10월 4일에 달 공전 궤도에 진입하였다.

사회와 문화

국제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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