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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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국의 역사
이전 시대 요나라
~
다음 시대
거란국 서요
대요
大遼

艾遼國
Lia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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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대요(大遼 , 요어:艾遼國)
국조 검독수리
건국 건국선포: 916년 멸망: 1125년
면적 약 4,000,000㎦
인구 약 3,500,000 명(서기 1100년 추산)
수도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서경 대동부(西京大同府)
황제(皇帝) 요 태조 야율아보기(大聖大明神烈天皇帝)
요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
요 의종 야율배(耶律倍)
요 세종 야율원(耶律阮)
요 목종 야율경(耶律璟)
요 경종 야율현(耶律賢)
요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
요 흥종 야율종진(耶律宗眞)
요 도종 야율홍기(耶律洪基)
요 천조제 야율연희(耶律延禧)
공용어 중세 요어, 중세 중국어
종교분포 샤머니즘(국교) , 불교 93%,
화폐단위
표어 요본조선고양 기자팔조지교 유풍귀속 개유존자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1]
연호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會同) 938년 ~ 947년
대동(大同) 947년
천록(天祿) 947년 ~ 951년
응력(應曆) 951년 ~ 969년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5년
청녕(淸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대강(大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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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  《요사(遙史)》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 《요사(遙史)》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
즉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 《요사(遙史)》

10-11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대요(大遼, 요어:艾遼國, 툼 랴오 울루스) (916년 ~ 1125년)는 거란족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세운 왕조이다. 야율아보기가 세웠으며 몽골, 둥베이, 화베이의 일부를 차지하며 10~11세기경에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세를 자랑했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大遙)로 바꾸고, 1125년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망했다. 보통 '요'라고 한다. 국력 뿐만 아니라 문화력도 유목민족중엔 가장 융성하여 요 대의 문자와 불교문화등이 고려의 팔만대장경판, 조선의 훈민정음등에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요국의 황실 황제 야율토후가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11대손이다.

국호

사실 '요'라는 국호는 2대 황제 요 태종 때 처음 썼는데, 그전까지는 스스로를 카라 키탄, 한문으로 대거란국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흔히 카라 키탄은 요의 후계국인 서요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요카라 키탄이라 칭한 것은 대거란이라는 본래의 국호를 계속 사용한 셈. 카라 키탄이라는 말을 한자로 흑거란(黑契丹)이라고도 쓰는데, 이는 '카라'가 튀르크어로 검다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거란(大契丹)'이 본래 의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이라는 이름은 민족 이름도 가리키지만 이들이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이기도 하다.

몇몇 나라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 중 키탄 혹은 키타이(영어로 하면 캐세이(Cathay)[1])가 있는데, 이는 바로 거란족들이 스스로를 부른 명칭인 키탄에서 온 것이다.

동양에서 "동방견문록"이라고 불리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도 북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른다.[2]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중국을 키타이[3]라 부르는 것을 보면 요나라의 역사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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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년동안 지속되며 독자적인 문자인 요자(遙字)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시대의 한족 왕조였던 북송을 번번히 관광태웠다. 개조는 요 태조 야율아보기. 황성(皇城)은 야율(耶律).

요나라는 요하와 발해의 왼쪽에 도읍을 정하고 탁록의 오른쪽에 고을을 두어 병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그들은 수나라 시대에는 흘신수에 의거하며 살면서, 10부로 나뉘어 있었다. 군사가 많은 부는 3천 명에 달하였으며, 적은 부는 1천여 명이었다. 추위와 더위에 순응하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가축을 길렀다. 침략이나 정벌을 나갈 때에는 10부가 서로 상의하였으며, 군사를 일으켜 전쟁할 때에는 의견이 모여진 후에 행동하였다. 수렵할 때에는 각 부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대하씨가 용맹한 군사 4만 3천 명을 소유하였으며, 8부로 나뉘어 있었다. 대하씨가 중간에 쇠퇴하자, 겨우 5부만이 잔존하였다. 야율아리가 5부를 나누어 8부로 만들고 2부를 세워 전 부족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3야율을 나누어 7부로 만들고 2심밀씨를 5부로 만들어 모두 20부를 만들었다. 나무에 부호를 새겨 서계를 만드니 정령이 잘 행하여졌다. 대하씨가 손위하고 나라를 다스리지 않아 요련씨를 세워 대하씨를 대신하게 하면서, 병력이 더욱 강대하게 되니 이 사람이 바로 태조의 6세조이다.

태조가 운중에서 이극용과 만났을 때, 군사가 3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요련야란가한 10년 신유년(901년)에 태조가 부월을 하사받고 독자적으로 정벌에 나서, 실위와 우궐과 해를 격파하고 이루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포로와 여장을 노획하였다. 10월에 대질렬부 이리근을 제수받고서는 병력을 모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11년(902년)에 군사 40만 명을 거느리고 대북을 쳐서 9개 군현을 정벌하여 9만 5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12년(903년)에 덕조가 해(奚)를 토벌하여 7천 호를 포로로 잡았다. 15년(907년)에 요련가한이 죽으면서 유명으로 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조 즉위한 지 5년(911년)에 서해(西奚)와 동해(東奚)를 쳐서 전부 평정하고, 해와 습(霫)의 백성들을 모두 차지하였다. 6년(912년) 봄에 몸소 유주 정벌에 나서니, 동서로 이어진 정기가 수백 리에 달하였다. 군대가 지나는 군현마다 풍문만 듣고도 놀라서 모두 함락되니, 많은 무리를 포로로 잡아 개선하였다. 가을에 몸소 배음국을 정벌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신책 원년(916년)에 몸소 돌궐과 토혼과 당항과 소번과 사타 등의 여러 부를 정벌하여 1만 5천 6백 호를 포로로 잡았고, 진무를 공격하여 이긴 승세를 타고 동쪽으로 울주와 신주와 무주와 규주와 유주 등 5주를 공격하여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은 14,700명의 수급을 베었다. 대북과 하곡과 음산의 백성들을 전부 차지하고서, 드디어 음산 북쪽의 8군마저 차지하였다. 4년(919년)에 몸소 우골리국을 정벌하여 14,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5년(920년)에 당항을 정벌하여 2,600명을 포로로 잡고 천덕군을 공격하여 12책을 함락시키고, 그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6년(921년)에 거용관을 나와서 군사를 나누어 단주와 순주 등과 안원군과 삼하와 양향과 망도와 노와 만성과 수성 등의 현을 공략하여 그 백성들을 사로잡아 내지로 옮겼으며, 황태자도 정주를 공략하여 매우 많은 포로를 잡았다. 천찬 원년(922년)에 호구가 늘어나면서 통할이 느슨해지므로 북대농올을 나누어 2부로 만들고 2절도사를 두어 통치하였다. 3년(924년)에 서쪽으로 당항 등을 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포로를 잡았다. 4년(925년)에 또 몸소 발해를 정벌하였다.

천현 원년(926년)에 발해국을 멸망시켜, 사방 5천 리의 영토와 수십만 명의 군사, 5경과 15부와 62주의 민중들을 모두 차지하여 거란이 한층 더 강대해졌다.

회동 초년(938년)에 태종이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세워주자, 후진이 연과 대 16주를 헌납하여 백성 수가 많아지고 군사가 강성해져 막아설 자가 없게 되었다.

5대 10국의 혼란기 중에 후진석경당이 찬탈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북방 영토인 연운 16주(燕雲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인근의 중국 동북부 지방)를 획득하였다. 이후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가 태종대에 이 지역을 되찾고자 전쟁을 걸었으나 소태후가 이끄는 요나라군에게 관광당했다. 요나라는 진정 당나라 군대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약해빠진 송나라를 어퍼컷 내리컷으로 마구 박살내고 끊임없이 송나라를 뜯어먹었다. 워낙 괴롭힘이 심했는지 수호지 등에는 원래 없던 요나라를 밟는 부분까지 추가되었다.

원래 요나라는 송나라를 적당히 상대하면서 공물과 약간의 영토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 대신 힘을 아껴서 요동에서 바이칼 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북방민족들을 통제했다. 이 때문에 의외로 요나라는 중앙아시아 쪽에서 상당히 유명하며, 요나라가 멸망한 후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상당히 이름을 떨쳤다.

특징으로는 거란국과 한족의 통치제도를 분리했다는 것. 본디 자신들이 살던 유목민족의 땅은 옛날처럼 다스렸고, 연운 16주 등의 새로 확보한 영토는 군현제를 채용하여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이런 과정에서 송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할까봐 경계했기 때문. 1국가 2체제 경영에 성공한 나라. 이중 통치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송사 요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였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실제 요나라 시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나 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과 사모를 입은 요나라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5]

우리에겐 고려 초기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애초에 이들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초기 북진정책으로 북방을 공략하며 동북아시아의 세력구도를 엿보던 고려와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요나라에서 잘 지내보자고 보낸 낙타 선물을 고려 태조 왕건이 모두 다리에 묶어놓아 굶겨 죽이고 사신은 귀양 보내버린 일화가 유명하며[6], 요성종 대에는 3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되어 한 번은 서희의 말빨에 휘둘려 엄한 땅만 삥 뜯기고, 한 번은 수도 개경을 어찌어찌하여 털었지만 결국 고려의 청야전술에 의해 큰 피해를 입어서 본전도 못찾고[7], 또 한 번은 강감찬에게 탈탈 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요전쟁 항목 참조. 고려와 요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이 전쟁 후 요나라는 고려는 물론 송나라까지 더 이상 공략할 여력과 의욕을 상실하여 약 120여 년 간은 고려 - 요나라 - 송나라의 3강 구도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며 무역과 문화를 활발히 나누게 된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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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거란인과 기타 유목민은 고유한 제도(북면제)로 다스리고, 한족과 농민은 중국의 제도(남면제)로 다스리는 이원 지배체제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국가 중대사는 거란인이 주재해 거란인이 우월을 지켰다.

중앙정부 최고 기관으로 북·남 추밀원(北南樞密院)이 있었는데, 각각 독자적으로 부서를 거느렸다. 북면관에는 거란의 독자성이 강한 기구를 설치하고, 남면관에는 중국식 6부를 설치했다.

지방제도도 부족제와 중국식 주현제로 나뉜다. 거란족과 유목민에게는 기존 혈연 조직을 재편한 부족제를 시행해서 중앙의 통치 권위를 세웠다. 발해지역에는 동란국을 세워 발해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했는데, 이는 사실상 중국식 주현제였다. 연운십육주 지역도 주현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법 적용에 있어서도 거란인과 유목민에게는 거란의 법을, 발해와 중국인에게는 중국법을 적용했으며, 관할 관청도 달랐다. 법률문제를 관장하는 중앙정부기구로 이리필원(夷離畢院)이 거란인을, 대리사(大理寺)나 형부(刑部)가 한족을 담당했다. 지방에서는 거란족은 부족장이, 한족은 주·현의 장관이 관여했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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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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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중기병 요나라 기병 요나라 투석병

요나라의 병제는 15세 이상에서 50세 이하까지를 병적에 등록했다. 매 정군(正軍) 1명에 말 3필, 타초곡(打草穀: 거란 초기에 매일 기병을 사방으로 내보내 약탈을 해 와서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는데, 이것을 타초곡이라 하였다.)과 수영포가정(守營鋪家丁: 일꾼) 각 1명이 딸렸다. 한 사람마다 철갑(鐵甲) 9벌, 마천(馬韉), 비(轡: 고삐 혹은 재갈), 마갑피철(馬甲皮鐵: 가죽과 쇠로 만들어진 말 갑옷), 군정의 힘을 살펴서 힘에 걸맞은 활 4장, 화살 400개, 길고 짧은 창, 골타(餶朶: 철퇴), 부월(斧鉞: 도끼), 작은 깃발, 추추(鎚鎚: 쇠망치), 화도석(火刀石: 부싯돌), 마우(馬盂), 사(粆: 말린 양식) 1말, 사대(粆袋: 말린 양식을 담는 가죽 부대), 탑구(搭鉤: 갈고리), 전산(햇빛 가리개) 각 1개, 미마승 2백자는 모두 스스로 준비하게 하였다.

사람과 말에게 곡식과 풀을 주지 않고, 대신 날마다 타초곡기(打草穀騎: 타초곡 임무를 맡은 기병)를 사방으로 내보내 빼앗아 와서 공급하게 하였다. 금어부(황금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패)를 주조하여 군마를 조발하였다. 말을 징발하거나 명령을 전할 때에 쓰는 은패 2백 개가 있었다.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밤중에 사람과 말의 소리를 살피는 원탐난자마(遠探攔子馬: 정찰 기병)가 있었다.


대개 전쟁을 일으킬 때는 황제가 번한(蕃漢: 오랑캐와 한족)의 문무 관료를 거느리고 푸른 소(靑牛: 사실은 검은 소黑牛다. 한자로 검은 색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길하게 여겨서 관례상, 검은 소를 푸른 소라고 부름)와 하얀 말로 하늘과 땅과 태양에게 제사를 올려 고유하고, 달에게만은 절하지 않는다. 근신들을 나누어 태조 이하 여러 능과 목엽산신에게 고하도록 명하고, 각 도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집하였다. 오직 남, 북, 해왕과 동경의 발해 지역 병마(兵馬)와 연경의 통군병마군사는 비록 조서를 받더라도 감히 발병하지 못하고 반드시 천자에게 아뢰게 한다. 그러면 황제는 대장을 파견하며, 금어부를 지니고 가게 하여 그것이 서로 부합한 뒤에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처음 조서를 받으면 매호의 장정을 모으고 각 호의 군수를 균등하게 내게하고 병적을 조사하고 모두 모여 명령을 기다린다. 10장 이상부터 차례로 군마와 기장을 점검한다. 금어부가 이르면 병마는 본사가 직접 통솔하며, 사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오직 함께 군마를 점검하고 나면 다시 황제에게 아뢴다. 병마가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다시 사자에게 명하여 군사를 세우고, 본사와 함께 감독한다. 또 5방(方: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의 기와 북을 내도록 청하고 나면 황제가 몸소 장교들을 점검한다. 훈척대신들 중에서 행영병마도통, 부도통, 도감 각 1명씩을 뽑아 임명한다.

각 군의 병마 중에서 정예병 3만 명을 뽑아 호가군(護駕軍)으로 삼고, 효용(驍勇: 날쌔고 재빠른)한 자 3천 명을 뽑아 선봉군으로 삼고, 표한(剽悍: 거칠고 사나운)한 자 1백 명을 뽑아 원탐난자군(遠探攔子軍: 선봉군보다 20여 리 전방에 나가 적군의 동정을 살피는 척후군이다.)으로 삼아서 각각 장령을 둔다. 또 각 군의 부(部)마다 군사 수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10인 내지 5인을 뽑아 그들을 합하여 1대(隊)를 만들고, 별도로 장령을 세워 병마의 징집과 공사의 교체에 대비한다.

남쪽의 송나라를 정벌할 때에 군사 점검은 주로 유주 북쪽 1천 리 지점에 있는 원앙박에서 했다. 행군할 때에는 거용관, 조왕곡, 백마구, 고북구, 안달마구, 송정관, 유관 등의 길을 고른다. 평주와 유주 지경에 이르게 되면, 사자를 보내 길을 나누어 출발을 재촉하고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곡식을 밟을까봐 우려해서이다.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군사를 철수하는 것은 12월을 넘기지 않았다. 행군하는 길에는 승려나 상복 입은 사람을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황제가 몸소 출정할 때에는 친왕(親王: 왕의 친척 남자) 1명을 유주에 남겨 권지군국대사를 맡긴다. 이미 송나라 경내에 들어가면 군사를 3로로 나누어 광신군, 웅주, 패주로 각각 들어간다. 어가는 반드시 중도로 경유하고, 병마도통과 호가 등의 군사들이 모두 따른다. 각 노의 군마가 현이나 진을 만나면 즉시 공격한다.

만약 큰 주나 군을 만나면 반드시 먼저 그 허와 실을 헤아려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라 판단되면 그때 군사를 진격시킨다. 지나는 길가의 민가, 동산, 뽕나무는 반드시 베거나 불을 놓아 폐허로 만든다. 송나라 북경에 도착하면 3로로 나누어 진격했던 군사들이 모두 모여 공격하여 취할 곳을 의논한다. 물러설 때에도 이렇게 한다. 3로 군마의 전후와 좌우에는 선봉이 있다. 원탐난자마의 각 10여 명을 선봉 앞뒤 20여리에 배치하는데, 전신 갑옷을 입고 밤중에 매 10리 혹은 5리를 가서 잠시 머물면서 말에서 내려 사람이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살핀다. 소리가 나면 즉시 사로잡고 상대할 수 없으면 선봉에 급히 알려 힘을 합쳐 공격한다.

대군을 만나면 주수(主帥: 주장)에게 달려가 보고한다. 적중의 허와 실을 반드시 파악한다. 군사가 행군하다가 도(道)와 주(州)의 성에 이르러, 방어가 견고하여 공격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지나간다. 다만 적들이 성을 나와 길을 막을까 우려되므로, 성을 에워싸고 활을 쏘면서 요란하게 북을 치며 거짓으로 공격하는 척한다. 이에 적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앞길이 막힐 염려가 없게 되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는데, 군사를 나누어 노략질하게 하고 곳곳의 주성들이 서로 연락을 못하도록 하여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든다.

지나는 곳의 크고 작은 주성에서 밤중에 군사를 내어 돌격하거나 이웃한 주와 군마를 모을 계책을 할까 우려가 되므로, 초경이 되면 매 성마다 기병 1백 명으로, 성문 좌우 1백 여 보 지점에서 갑옷과 병기를 갖추고 말을 타고 지키게 한다. 적군들이 성을 나오는 경우 대적할 힘이 부족하면 되돌아 달려가 병력을 모아서 싸운다. 좌우의 관도(管道: 큰 길大路), 비탈길, 산길, 나루 등에도 밤중에 군사를 파견하여 순라(순찰)를 돌게 한다.

타초곡 가정들이 각각 갑옷을 입고 병기를 지니고 둥글게 대를 이루어, 반드시 먼저 원림을 베고 난 뒤에 (현지의) 노인과 아이들을 잡아다가 흙과 나무를 옮기게 하여 호참을 메운다. 성을 공격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을 먼저 성에 오르게 해서, 화살과 돌과 쇠뇌와 나무들이 떨어질 때에 노인과 아이들만 다치게 한다. 또 본국 주와 현의 한족 향병 1만 명을 일으켜, 군대를 따라 다니며 원림을 베어 도로를 메우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황제가 주둔하는 채나 여러 군영의 보루는 오직 뽕나무와 배나무와 밤나무만을 사용한다. 군사가 물러날 때에는 불을 질러서 태워버린다. 적군이 이미 진을 치고 있으면 그 진세의 작고 큼과 산과 냇가의 형세, 오고 갈 도로와 구원할 지름길과 조운의 길을 헤아려 각각 제압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서 사방에 진을 치고 기병을 정렬하여 대를 이루게 하는데, 대마다 5~7백 명이며 10대가 1도가 된다. 10도로 한 면을 담당하게 하며, 각각 주수를 두었다. 가장 앞에선 1대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한다. 소득이 있으면 여러 대가 일제히 나아가고, 소득이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며, 제 2대가 그 뒤를 이어 돌격한다. 물러난 자들은 말을 쉬게 하며 물과 여물을 먹인다. 각 도에서 모두 그렇게 한다. 다시 물러났다가 번갈아 나아가는데 적진이 움직이지 않으면 힘들게 싸우지 않는다. 2~3일을 보내면서 (적군이) 곤핍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타초곡 가정들을 시켜 말에 빗자루 두 자루를 매어, 바람을 이용하여 빨리 달리게 해서 적진에 먼지를 날리며 번갈아 오고 가게 한다. 그리하여 적의 진중이 굶주리고 피곤해져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만약 진영의 남쪽이 승리하고 진영의 북쪽이 패했는데도, 주장이 진중에 있어 알지 못하면 본국의 산과 냇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신호를 보내어 서로 구원한다.

황제가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에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신하가 15만 명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3로로 나누어 출정하는데, 북경에서 군사를 모아 9월에 진격하고 12월에 물러나며 나머지 행사는 황제가 출정한 때와 같다. 봄 정월과 가을 9월인 경우는 도총을 임명하지 않고, 다만 기병 6만을 보내는데 깊이 쳐들어가거나 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한다. 다만 국경 밖 3백리 내에는 생활할 수 있는 근거지를 없애 곡식을 심거나 가축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

군사가 남쪽 송나라 경계에 들어가면 보병과 기병과 수레는 밭이랑을 지나가지 않는다. 3도에 장령 각각 1인을 두고 장령들은 각자 난자마 1만 필을 거느리고 흩어져서 110리 밖을 돌아다니며 번갈아 순찰을 돈다. 날이 저물어 뿔나팔을 불어 신호를 보내면 군사들은 돈사로 나아가 어장을 둘러싼다. 가까운데서 먼 곳에까지 나무를 조금 휘어서 마굿간을 만들고, 창영이나 참책은 설치하지 않는다.

매번 행군할 때 북을 세 번 두드리면 낮과 밤을 불문하고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큰 적을 만나지 않으면 전투용 말을 타지 않고, 적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새롭게 대기하고 있던 말을 타기 때문에 말의 힘이 넘친다. 대오를 갖추기만 하고 싸우지 않다가 퇴각하면 말을 탄다. 복병을 많이 설치하여 군량을 차단하고 밤새 횃불을 밝히며 거센 바람이 불면 섶을 끌어 먼지를 일으킨다. 스스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전쟁을 잘하며 추위를 잘 견딘다. 이것이 군사가 강한 까닭이다.

경제

요는 농업을 장려해 농업 생산에 주력했고, 여기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직물·도자기·기와·마구 등 제조업이 발달했으며, 인쇄술이 발달해서 거란대장경을 조판했다. 제조업 발달을 배경으로 상업도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요는 북송, 고려와 교역하였다. 요와 송은 차, 비단, 도자기, 양, 말, 낙타와 교역하였으며, 고려와 함께 금, 은, 인삼, 말, 가죽 등과 함께 교류하였다. 요는 송, 고려는 공통적으로 말을 가지고 교역하였다.

문화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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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요나라 남성의 헤어스타일. 변발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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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인들의 티타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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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요나라 귀족들의 복장 모습. 요나라는 여타 유목민의 국가와 달리 문화수준이 한족과 대등했다.

요나라의 복장은 몽골이 세운 원과 여진이 세운 금,청과 동일하게 남성은 변발을 하는 대신에, 그 종류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했으며 여성은 변발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복장에서는 중국 한족의 복장을 따랐으며, 여러모로 용모면에서도 한족의 복장과 대등하게 갖춰 입었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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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시기 풍경산수화

요나라는 당대 동아시아에서 손꼽힐만한 융성한 불교문화를 가진 나라였는데, 984년에 가 세운 허베이 성의 독락사 관음각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건축 기술을 계승한 것이다. 1054년에 산시 성에 세운 목탑은 8층으로, 규모와 기술에서 전대미문의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동몽골의 경릉에서 발굴한 인물화, 산수화, 사원 벽화가 대표적이다. 산수화에는 사냥을 즐기는 거란족의 생활 풍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당과 5대의 산수화 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요삼채(遼三彩)라고 부르는 도자기도 유명하다. 요삼채는 당삼채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자연 경관과 사계절의 변화를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거란민국은 전통적으로 미술문화가 매우 발달한 편. 특히 여성군주였던 요 회조는 미술을 즐겼던 왕이었기 때문에 산수화,인물화등의 그림등이 현대에 와서도 많이 발달했다. 또 그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수공예를 통한 조각예술도 많이 발달됬다 또한 불교 관련 예술도 발달하였는데, 특히 요 태조 야율아보기 시기부터 크게 번성하였다. 요 태조는 건국 초기인 926년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승려를 포함한 발해인 50인을 당시 수도였던 요나라 상경으로 데려가 천웅사(天雄寺)를 짓게 하였다.

건국초기에는 불교가 요의 보편적 종교가 아니었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찰을 건립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으나, 이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과 운강석굴이 있는 대동(大同), 즉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이전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곳이고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 요의 불교 또한 황실의 보호 아래 발전해나간다. 현재 북경, 천진, 하북, 산서, 요녕, 내몽골 등 북방각지에는 요대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중 요녕성지역에는 유명한 조양북탑(朝陽겗塔)을비롯해 40여기의 거대한 요대 불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요나라 탑은 조양 북탑이 70m가 넘고, 다른 탑들도 대체로 평균 높이가 40m 이상이 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탑이 세워지는 장소가 사면이 트인 도로의 한 복판이나 높은 산의 정상부, 산이 없는 지역에선 구릉의 정상부 등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이다. 즉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곳에 탑이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도 도시에서는 상징이 되어 있다. 게다가 요나라 탑은 대부분 사찰과는 상관없는 곳에 세워져 있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불탑들과는 조성배경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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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개방된 성문화 덕에 춘화도(春畵圖)도 매우 발달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3]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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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현목탑 요양백탑 조양복탑

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에 심취한 요나라 황실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절에 시주했고. 불교 관련 잦은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아 재정 악화가 가속화 된 점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나라 황실의 국찰이었던 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 때 다시 중건하였긴 했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 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쇼킹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근데 과연 거란족이 만들었을까는 의문이다. 요서에 의하면 싸우고 태우고 빼앗는게 주특기였던 북방 민족인 거란족이 불교 경전과 건축물을 만들 때 한족 장인들을 대거 채용했기 때문.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것에 진심으로 심취하고 신앙했다는 증거이니 단순한 야만족이란 인상과는 대비되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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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관음상 화엄사 요나라 불상 화엄사 요나라 불상2

거란의 고유 종교는 원시적 샤머니즘이었다. 태무(太巫)라는 사제가 범민족적인 제사를 주관했고, 각 씨족마다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가 있었다. 발해와 중국에서 불교를 도입했고,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많은 발해 승려가 요의 수도에 사찰을 세웠다. 화엄종이 가장 융성했고, 진언종과 다라니 신앙도 민간에서 성행했다. 성종 이후에는 대장경 등 불교 서적을 인쇄했고 명승도 나왔다. 한족이 들어오면서 유교도교도 함께 들어왔지만, 유교는 한족 지배를 위한 방책에 불과했고, 도교는 민간에서 유행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본래 거란의 고유 종교는 원시적 샤머니즘이었다. 태무(太巫)라는 사제가 범민족적인 제사를 주관했고, 각 씨족마다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가 있었다. 발해중국에서 불교를 도입했고,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많은 발해 승려가 요의 수도에 사찰을 세웠다. 화엄종이 가장 융성했고, 진언종과 다라니 신앙도 민간에서 성행했다. 성종 이후에는 대장경 등 불교 서적을 인쇄했고 명승도 나왔다. 한족이 들어오면서 유교와 도교도 함께 들어왔지만, 유교는 한족 지배를 위한 방책에 불과했고, 도교는 민간에서 유행했다. 요나라가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처음에는 불교를 믿던 한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거란은 원래 샤머니즘을 숭상하던 민족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불교에 심취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요나라 황실, 귀족을 비롯한 거란족들까지 진심으로 불교를 승상하기 시작했다. 요 성종[4] 시기에 이르러서는 불교 문화가 중원의 한족 문화에 맞서 거란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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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흥종도종은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5] 불교는 초창기부터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고 불교 신앙이 장려되었다. 유명 사찰의 승려들(대사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면서 사적으로 절친하게 지냈으며 거대한 사찰과 불상 건립, 대장경 간행은 물론이고 말기에 가면 승려들이 관직 진출이 두드러지는 등 정교 일체화 현상까지 일어났다.

요사에는 도종하루에 3000명이 출가(...)했으며 36만 명의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유학이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요나라에서는 사찰이 서민들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사찰이 관리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불교 국가가 된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은 크게 쇠퇴하였으며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나라 황실에서는 불교를 장려하면 승려들이 빈민층을 구휼하는데 힘쓰는 등 좋은 일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정작 그 시대 요나라에 다녀왔던 송나라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상당수 사찰들이 고리대업으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를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

요나라의 불교는 친척인 몽골티베트 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였다. 요나라 시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선연(鮮演)대사가 있다.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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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연녕(耶律延寧)의 비문. 986년에 대자(大字)로 작성되었다. 거란소자 칠언절구 동경(契丹小字七言絶句銅鏡) 요자 백지

요족(遙族)은 고유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서 독자적인 문자인 요자(遙字), 당시는 거란문자라고 불리던 요자를 만들었다. 태조는 대자(大字)를 만들었고, 위구르 문자를 본떠 소자(小字)를 만들었다. 요자(遙字)는 공문서에 사용한 표음문자로 한자의 해서전서를 모방한 서체인데, 현재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요어는 고대 몽골어와 유사하다. 요자(遙字)는 요나라 멸망 이후에도 후요, 서요에서 간간히 쓰이다 신요 요 회조 시대 부활하여 지금까지도 요국의 국가어로 쓰이고 있다.

역대 황제

요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요 숙조
(遼肅祖)
(요 태조 추숭)
소열황제
(昭烈皇帝)
야율누리사
(耶律耨里思)
- - -
- 요 의조
(遼懿祖)
(요 태조 추숭)
장경황제
(莊敬皇帝)
야율살랄덕
(耶律薩剌德)
- - -
- 요 현조
(遼玄祖)
(요 태조 추숭)
간헌황제
(簡獻皇帝)
야율균덕식
(耶律勻德寔)
- - -
- 요 덕조
(遼德祖)
(요 태조 추숭)
선간황제
(宣簡皇帝)
야율살라적
(耶律撒喇的)
- - -
제1대 요 태조
(遼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916년 ~ 926년 조릉(祖陵)
제2대 요 태종
(遼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會同) 938년 ~ 947년
대동(大同) 947년
927년 ~ 947년 회릉(懷陵)
- 요 의종
(遼義宗)
(요 세종 추숭)
문헌흠의황제
(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 현릉(顯陵)
- - 장숙황제
(章肅皇帝)
(요 목종 추숭)
야율이호(耶律李胡) - - -
제3대 요 세종
(遼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년 ~ 951년 947년 ~ 951년 현릉(顯陵)
임시 - 익무황제
(翼武皇帝)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년
제4대 요 목종
(遼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년 ~ 969년 951년 ~ 969년 회릉(懷陵)
제5대 요 경종
(遼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969년 ~ 982년 건릉(乾陵)
제6대 요 성종
(遼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융서(耶律隆緖)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982년 ~ 1031년 영경릉(永慶陵)
제7대 요 흥종
(遼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5년
1031년 ~ 1055년 영흥릉(永興陵)
제8대 요 도종
(遼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淸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대강(大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1055년 ~ 1101년 영복릉(永福陵)
- 요 순종
(遼順宗)
(요 천조제 추숭)
대효순성황제
(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
제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1101년 ~ 1125년 건릉(乾陵)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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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 , 요어:仆文有仌 巿)는 요나라의 역사서로 중국의 정사인 이십사사(청나라 건륭제가 정한 24종의 기전체 역사서) 중의 하나이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역사를 다룬 116권의 사서이다. 원나라 때 재상 토크토(脫脫) 등이 사료를 모아 1344년 완성하였다. 청나라 때의 역사학자 조익의 《이십이사답기》(二十二史箚記)에서는 “요사, 금사 이 두 사서는 빠지고, 생략된 것이 많다”고 했지만, 요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역사 자료이고 기전체(紀傳體)로 편찬된 것이 특색이다.

유명인물

창작물

같이 보기

  1.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2. 출처: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71
  3.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kes&logNo=130184524148&parentCategoryNo=&categoryNo=5&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4. 요 성종의 거란 이름인 문수노 부터 문수보살에서 따 온 이름이다.
  5. 이 때문에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