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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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化国
세이카국
Flag of Seika.png 세이카의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 바다는 우리들의 어머니
국가 동토의 태양
세이카국의 지도 작은버전.png
수도 니시노미야
정치
공용어 일본어(사실상 세이카식 일본어), 러시아어(일부 지역에서 지정)
정부 형태 단일국가, 의원 내각제, 입헌 군주제
국왕 도쿠가와 요우
총리대신
부총리대신 겸 국회의장
대법원장
사쿠라우치 리코
카게야마 토비오
히나타 쇼오
역사
정부수립  
 • 무진전쟁 1868년 1월 27일
 • 막부천정 1869년 7월 1일
 • 기묘유신 1879년 1월 29일
 • 삿포로 조약 1945년 10월 1일
지리
면적 160,021km² (95 위)
내수면 비율 0.6%
시간대 SST (UTC+10)
인구
2016년 어림 44,600,000명
2015년 조사 44,195,296명 (29위)
경제
 • 일인당 24,663$ (14위)
명목 1조 1천억 (16위)
HDI 0.896 (18위, 2015년 조사)
통화 세이카 엔 (SKY) ()
기타
ISO 3166-1 390, SK, SEK
도메인 .sk
국제 전화 ++87

세이카국(일본어: 正化国 세이카코쿠[*], 정화국)은 동아시아에 자리한 섬나라이다. 약칭으로 세이카(正化, 정화)라 불리운다. 국토는 북태평양에 있는 겐소지마 섬 및 부속 도서이며, 수도는 니시노미야(西宮)이다. 보신 전쟁(戊辰戰爭, 무진전쟁)에서 패한 에도 도쿠가와 일족과 잔존 세력들이 지금의 겐소지마 섬에 상륙하여 건국하였으며, 기묘유신과 양차 대전, "나미와 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경제 성장을 통하여 인구 약 44,600,000명(29위), 명목 GDP 1조 1천억 달러(16위)에 육박하는 지역 강국이자 선진국 지위로 성장하였다.

오늘날의 세이카는 1945년 삿포로 조약으로 지위와 정체성을 확립하였으며, 도쿠가와 왕실이 입헌 군주직을 세습하는 입헌 군주국이다. 국회는 총 300석의 단원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정당으로는 보수당, 민주당, 국민회의, 사회민주당, 민족전선 등이 있다. 현 국왕은 2017년 1월 1일에 즉위한 도쿠가와 요우, 총리는 보수당 소속의 사쿠라우치 리코이다.

개요

우마루가 운영하고 있는 일본계 가상국가이다.[1]

국호

역사

틀:세이카의 역사

개요

겐소지마(幻想島, 환상도) 섬은 아시아의 가장 동쪽에 있다고 전해지던 일본보다도 더욱 동쪽에 있던 '미지의 섬' 이였다. 일본의 몇몇 어부들이 표류 중 발견하며 알려지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막부나 사람들은 겐소지마 섬을 허구라고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섬에 대한 환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환상과 미지의 섬으로써 여러 신화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며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어부들이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겐소지마 섬이 목격되며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도 이 섬을 발견하며 여러 이야기의 소재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보신 전쟁과 "위대한 도피"

19세기 중반 일본은 대격변을 겪고 있었다. 개항이 이루어지고 사쓰마 번, 조슈 번을 비롯한 여러 번국에서는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를 추구하였으며 삿초동맹이 체결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반막부 세력은 쇼군을 사임시키고 대정봉환을 성공시켰다. 마침내는 막부의 군함이 효고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던 사쓰마 번 군함을 공격하면서 무신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의 군대가 에도막부 세력 및 도호쿠지방의 오우에쓰열번동맹·아이즈 번·쇼나이 번 등과 벌인 이 전쟁은 무신전쟁이라고 불리며, 일본과 세이카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정부는 에도까지 점령하였지만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저항을 이어나갔고, 마지막으로 홋카이도로 떠나 에조 공화국을 선포하며 신정부군에 맞서 싸워나갔다. 하지만 하코다테 전쟁의 패배로 에조 공화국은 소멸되었다. 하코다테 해전에서 패배하자 구 도쿠가와 막부 세력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처음에는 신정부군에 항복을 하려 했으나 원로들의 주장으로 끝까지 도피하여 저항해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전설속의 섬 겐소지마를 찾아 거점으로 마련한 뒤 다시 재건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작전명 위대한 도피"라 불리는 이 계획을 실행한다. 사카이 다다즈미는 이를 두고 "이는 일본사 최대의 도박이 될 것이다... 우리도 도박사로써 모두 건 것이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869년 7월 1일, 에조 공화국의 정부요인들과 구 도쿠가와 막부 세력, 오우에쓰 열번 동맹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 및 아이누인들을 실은 배는 하코다테를 떠났으며 이들은 환상의 섬 겐소지마를 찾아 나선다. 10월 5일, 약 2개월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겐소지마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도쿠가와 세력의 재건을 다짐한다. 냉대기후였던 겐소지마는 추운 지역이였고, 처음 그들은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성을 건축하고 도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으며 재건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는듯 했다. 겐소지마는 19세기 후반까지 일본은 물론 서구열강까지도 그 존재를 정식으로 알지 못했던지라 구 막부세력은 재건에 집중할수 있었다.

건국과 기묘유신, 성장을 거듭하다

1875년 어느정도 재건이 이뤄지고 인구도 늘어나자 정식으로 다시 국가를 선포하여 본토 수복을 위한 세력을 키우기로 하고 도쿠가와 막부의 후예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군주로 옹립하였고, 국명을 "세이카"라고 하여 입헌군주제 국가를 결성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나 총명하여 금방 왕의 지위에 적응하며 정치를 펼쳤다. 한편 1879년에는 또다른 대형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국의 함대가 겐소지마를 발견하고 겐소지마에 접근한 것이다. 미국은 개항과 요구사항들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침공할 생각이였지만, 미국의 예상과 달리 세이카는 개항과 요구사항을 받아들인다. 당시 원로였던 우에스기 나리노리는 "세이카는 어쩌피 새로 생겨난 나라다.. 그리고 재건하여 본토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다.. 그럴려면 저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하는게 좋다"는 주장을 했고 그 주장은 일리있다고 여겨져 받아들여졌다.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이들과 접촉한 후 개항을 받아들이고 신문물을 수용한다. 신문물을 수용한 뒤 일본에 대항할만한 힘을 되찾겠다는 것이였다. 그 결과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였고 서구문물을 들여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식민지화를 피했으며, 발전했다는 점에서 이는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다. 신문물의 우수함에 놀란 요시히사는 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정부요인들과 의논하여 개혁을 실행한다. 우선 유학생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돌아온 사절단은 "서양의 문물과 방식을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고, 건의를 수용하였다. 여기에서 출발한 개혁을 기묘유신이라고 하며, 세이카의 근대사에서 무신전쟁과 함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분류된다.

신문물이 유입되자 사회는 발빠르게 변화되었다. 서양식 건물이나 의복이 수용되어 만들어졌고 군사적 개혁도 이뤄졌다. 무신전쟁의 패배를 교훈삼아 무기나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서양식으로 편제를 바꾸었다. 공장과 조선소도 건립하여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서양의 사상이나 철학, 서적 등을 번역하였다. 이런 개혁 결과 세이카는 근대적 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대로면 일본이 다시 쳐들어와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건설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주국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세이카의 근대 문학과 예술도 꽃피어났다. 세이카 근대 최고의 문학가로 불리는 타카미 치카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1880년대가 개혁의 시기였다고 하면, 1890년대 이후로는 안정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개혁을 거치며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한 세이카는 이제 내치에 신경을 썼다. 이 시기부터 근대적인 정치제도가 확립되며 선거도 시작되었다. 황무지와 미개척지를 개척하고 탐사하며 국토를 넓혀가는 한편, 국가의 틀을 잡아나갔다. 세이카의 정당들도 대부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본토 수복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재건하여 본토를 수복하고자 하였지만 재건이 생각외로 잘되어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하자 일각에서는 "그냥 이 섬에 눌러 앉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요시히사가 한 "안정부터 하자"는 한마디로 "수복이던 눌러앉든 안정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주변 섬들과 군도를 발견하며 적극적으로 영토에 편입했던 팽창의 시기기도 하다.

1900년대는 세이카의 전국토가 개척되었으며, 인구도 처음 정착했을때에 비하여 엄청나게 늘어나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시기에 다시 대립이 시작되었는데, "다시 일본을 쳐서 본토를 수복하자"는 정일론자들과 "아직 때가 아니다. 다른 국가들과 접촉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외교론자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며 정일론자들은 현재의 보수 정당 계열로, 외교론자들은 현재의 진보 정당 계열로 내려져오며 현재도 대립하고 있다. 우선은 외교론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개항 시기에 맺었던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은 존속했는데, 이들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02년, 외교관 히키가야 하치만을 필두로 한 외교단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미국 정부와 담판을 벌여 불평등조약을 평등조약으로 바꿔내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서구 열강에게서 세이카가 근대적 개혁국가로 인정받은 사건으로도 볼수 있다. 그 이후에는 숙적이던 일본에도 다시 접근한다. 이들은 일본이 영 달갑지 않긴 하지만 다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과 국교가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정일론자들은 극렬히 반대하여 외교론자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할복 소동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외교론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세이카의 국제적 입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득이였던 정책이였다. 그 이후 터진 제 1차 세계대전은 세이카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던 사건이다. 세이카는 명목상으로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이로 외교적 입지가 상승하였다. 또한 물품과 선박등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급발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은 세이카는 산업도 동시에 발전하였고 1920년대는 축적한 부와 호황기를 동시에 맞아 최고의 경기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민권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도 시작되었다. 평등선거권을 주장한 "20년대 데모크라시"나 아이누인들의 인권 증진 운동, 공산당의 창당 등의 사건이 벌어져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

내전과 암흑기

겐소지마 섬의 서쪽에는 "아이운 제도"라는 군도가 있었다. 아이운 제도는 개척기에 발견되어 세이카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멀고 추운 지방이여서 다른 지역에 비해 덜 개척되고 관심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아이운 제도는 사실상 방치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1917년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 성립되었고 적백내전 등이 일어나는 등 국가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생활이 힘들어진 러시아의 일부 농민이나 서민들은 생활에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겐소지마(러시아에서는 스네크 섬이라고 불렀다) 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떠나 새출발을 하고자 하였고, 러시아인들이 1910년대 후반부터 아이운 제도로 상륙하게 된다. 특히 극동이 러시아인들이 아이운 제도로 많이 상륙하여 일종의 러시아계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척박했지만 러시아보다는 나았던 세이카의 생활에 잘 적응해가며 부락을 여러개 형성하며 작은 국가와 비슷한 규모로 발전해 나아갔으며 러시아계는 세이카 본토의 정권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1930년대 중반까지 서로에 대한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1929년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서거한 것이다. 그 이후엔 도쿠가와 이에마사가 제 2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거기에다 미국의 대공황 영향으로 경제도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린다. 또한 이로 인해 진보 정당(외교론자 후예)에서 보수 정당(정일론자 후예)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새로 총리에 취임한 세이와 한다는 새로운 경제 정책을 제시하는데, 세이카판 뉴딜이라 불리는 "운메이 계획"이다. 이 정책이 세이카의 "운메이"(운명)를 가른다는 의미였다. 운메이 계획에 따라 세이카 곳곳에는 공공시설이 지어졌으며 경제 구제 정책이 실시된다. 이러한 운메이 계획은 효과를 어느정도 보게 되었고 1933년을 기점으로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운메이 계획도 비판이 많던 정책이였고 장기적으로 시행할수 없던 정책이였으므로 1937년 다시 경기가 악화되고 세이카의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였고 멘셰비키 세력과의 충돌로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또한 일본의 팽창과 중일전쟁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도 뒤숭숭한 시기가 바로 1930년대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탐험가들이 아이운 제도의 러시아계 세력을 발견하며 본토에도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다. 러시아계 부락은 탐험가들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며 공격을 가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고, 본토의 정부는 이들의 정체를 보고받고는 이들이 국가에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계들도 세력을 갖추고 있던 만큼 이는 내전급으로 커지게 되었으며 1935년부터 1939년 3월까지 약 4년간 전투가 발생하였다. 아무래도 러시아계들이 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본토급은 아니였으며 조금 부족한게 사실이였으므로 밀리는게 당연했고,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본토가 승리하며 종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이카의 지역감정 및 인종갈등의 뿌리가 태동하였으며 러시아인이 일본계와 함께 세이카의 주류 민족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현재도 세이카, 특히 아이운 제도에는 러시아인이 다수 살고 있으며 198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차별 정책에 의해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이는 1990년대 중반 "소러시아 공화국"의 선포와 내전으로 비화되기도 하여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현재는 융합 정책으로 화합이 이루어져 갈등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고 러시아계 총리 배출 등으로 러시아인들도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혼란스러웠던 세이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세이카는 다시 부활한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편에 서 미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군수 사업이나 공업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이와 한다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전군을 동원해 혹시 모를 일본 등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국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 이후 1941년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포고, 미국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치루었다. 세이카는 일본을 공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적합해 미군이 주둔하였고 이는 주세이카 미군의 시초가 되었다. 전쟁 중 일본의 공습과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며 일부 지역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시 전세가 역전되자 일본에 빼앗겼던 지역들을 탈환하고, 미국과 함께 일본 본토로 들어가 도쿄 대공습 등을 함께 수행하였다. 1945년,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다. 이후 1945년 10월 1일 삿포로에서 삿포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세이카와 일본 간 전투가 종결되고 세이카의 주권이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세이카는 이 전쟁으로 국제적 위치가 급상승하였다. 승전국이라는 입지와 일본의 항복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일로 미국과의 우호가 증진되었고 동맹 관계가 구축되었다. 세이카는 일본을 점령한 뒤 본토수복을 원했으나 미국은 천황을 이용하여 일본을 지배하는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정일론은 사실상 폐기되고 세이카로써의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종전 후에는 일본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함과 함께 미국의 대소련포위망에 합류하였다. 세이카는 소련과 아주 인접하였기에 공산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반공주의로 국가 노선을 잡으며 미국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혈맹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소련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국의 전진기지와 군수물자 공급지로 활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어 종전 복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55년에는 전쟁 피해를 말끔히 씻고 다시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세이카의 현대

1960년에는 보수정당들이 대합당하여 보수세력이 집권하는 60년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치가 안정되었다. 그러던 도중 1963년 도쿠가와 이에마사가 서거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제 3대 국왕으로 도쿠가와 츠네나리가 즉위하게 된다.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성장 계획으로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며 1960~1973년에는 초고도경제성장을 이뤄내었다. 이를 "나미와 강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오일쇼크로 피해를 보기도 하였으나 위기를 침착히 기회로 전환해 다시 안정성장기에 돌입하였다. 그 이후 정치의 안정과 함께 경제의 안정성장도 이어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아시안게임도 치루는 등 지역강국으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3저호황은 세이카 경제에 도움이 되었고 1990년대에는 최고호황기를 누리며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다. 1990년에는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 등이 붕괴되자 세이카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대서방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외교적 입지를 넓혔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타격을 입고 마이너스 성장세로 추락했다. 그 이후 보수정당에서 진보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경제 회복 정책이 시행된다. 결국 3차 산업 육성과 국민들의 노력으로 경제 불황을 탈피하고 2002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 골디락스 호황의 영향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듯 했으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또다시 경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등 혼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2014년 경제정책의 효과로 다시 어느정도 성장세를 회복하였다. 2016년에는 도쿠가와 츠네나리가 노환과 질병으로 인해 생전 사임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장남인 도쿠가와 이에히로도 2012년 성인병으로 서거하는 일이 발생하였기에 도쿠가와 이에히로의 유일한 자손이던 장녀 도쿠가와 요우가 국왕직을 물려받아 2017년 1월 1일 공식 취임하였다. 또한 2017년 1월부로 총선이 예정되어 있어 세이카는 2017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리와 환경

지형

기후

정치

경제

산업

교통

군사

세이카군이 있으며, 세계 군사력 순위 13위의 강군이다.

육군

해군

공군

외교

사회

민족

언어

종교

교육

문화

스포츠

각주

  1. 일본계 가상국가를 컨셉으로 하고 있는 나라로는 세이카 외에도 아키시오 등이 있으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구국, 마법국이 있었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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