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사칭 막부

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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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사칭 막부 (일본어: 中山偽称幕府 나카야마 기쇼 바쿠후[*])는 1627년부터 1875년까지 신페이 제도에 존속한 막부(?)이다. 도읍은 나카야마 (中山)다.

개요

나카야마는 지금의 야타마 시에서 남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10만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그러나 침례정사단의 정변 이후 침례정사단이 지금의 야타마로 수도를 옮기면서 급속도로 잉여화, 사채 전쟁, 제2차 닛초 전쟁신페이 내전을 거치면서 시가지가 파괴되어 주민들도 다 떠나서 현재는 히이로 군 (緋彩郡)에 소속된 정이다. 재밌게도 이 히이로 군은 나카야마 막부 시대에 는 나카야마 뒷동산의 공동묘지 이름이었다는 점. (정확히는 공동묘지가 히이로 산에 있었다.) 아키시오 정부는 세계 문화 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지만...꽤나 많이 파괴된 관계로 현실은 시궁창.

표제어대로 나카야마 사칭 막부라고 명명된 것은 후세의 (20세기) 일이다. 당연히 당대의 카미가와 씨나 막부 가신들은 자신들을 정통 막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왕 (덴노)의 공인이나 그와 연관된 증거가 없던 것이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사칭 막부로 명명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키시오의 사학자들이나 신페이 제도의 사학자들이나 일본의 사학자들이나 제3국의 사학자들마저도 거진 공통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카미가와 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예임을 주장하며 제멋대로 막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덴노에게 상소를 올릴 때는 "히가시후소 (아키시오를 가리키는 옛말)의 오랑캐와 반군들을 정벌하여 덴노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다"며 정이대장군 직위를 자청했다. 그러나 에도에 이미 막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카미가와의 뻘짓을 좌시하지 않아서 역으로 카미가와 일당을 조적 (조정의 적, 곧 역적)으로 지명해버렸다.

지리적으로도 떨어져있고 각잡고 정벌하면 금방 박살날 정도로 약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에도 막부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지만, 가려운 부분인 건 사실이어서 신앙 전쟁 직후 등나무의 맹을 체결하면서 이케다 철검대에게 나카야마 막부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역사

카미가와 사다하루의 창건

철검대와의 분쟁

분세이의 난과 위성국가화

요시노부의 개혁 시도와 좌절

멸망

문화

평가

쓸데없이 막부를 사칭하는 등 여러가지로 한계점이 많긴 했지만 신페이 제도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철검대와는 시시콜콜 다투었지만 아예 국경을 맞대고 있던 타치바나 씨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으며, 오히려 전간기에는 간간히 에도, 오사카나 후지시로와 무역을 하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다만 에도 막부의 그것을 답습한 반그리스도교, 쇄국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철검대가 스페인의 지도를 받으며 서양화되가던 것과는 달리 일본계 고유의 문화를 잘 유지하면서 신페이 제도에 이식하였지만, 결국 국력에서 철검대에게 상당히 밀렸기 때문에 분세이의 난 때 손도 못 쓰고 갈려나갔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싸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