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당 (아키시오)

개혁당
약칭 개혁
일본어명 일본어: 改革党 (かいかくとう)
표어 성찰하는 진보, 개혁되는 국가
상징색 파란색[1]
이념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파
당원  (2017년) 1,512,100명
당직자
대표 마츠야마 이치로
원내대표 아마시로 마사토
역사
창당 1978년 1월 5일
병합한 정당 민주당 (1990년 ~ 1996년)[2]
선행조직 공산당 사민계
이전 당명 사민주의개혁정당 창당준비위원회 (1977년)
개혁당 (1978년 ~ 1990년)
민주개혁당 (1990년 ~ 1996년)
예하 부문
중앙당사 후지시로 도 하나바 구 기지도마에 32-1 개혁당 중앙당사
정책연구소 국가개혁연구소
의석
아키시오 국회
88 / 300

개혁당 (일본어: 改革党 (かいかくとう) 카이카쿠토[*], 영어: The Reformer's Party of Akishio[3])은 아키시오정당 중 하나이다.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사회자유주의) 성향으로 분류된다.[4] 2017년 현재 사회당과 함께 원내에서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개요

1978년 1월 5일, 사회당공산당야스다 아키히데 등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성향 의원들이 탈당하여 만든 정당이다. 국민과 기업의 자유를 허용하되, 국가가 기업의 전횡을 막기 위한 감독 역할을 맡는 사회자유주의·수정자본주의에 입각한 정책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으로 분류하고 있다.[5]

역사

거대 정당의 비극

1970년대 공산당은 1968년 아키시오 총선거에서 기독민정당, 민주당과의 연계로 연립 여당이 되었고, 1972년 아키시오 총선거에서는 여러 좌파층 인재 영입과 총인구의 60%까지 늘어난 노동자층에게 집중 어필하는 정책이 먹혀들어 총 300석 중 159석을 확보, 단독 과반 여당이 되었다. 문제는 공산당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어난 덩치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공산당에는 여러 계파가 존재했는데, 이 중 주류를 이루는 계파가 야스다 아키히데 (安田哲秀)의 사민계였다. 야스다는 일본 공산당 동부지원추진위원회[6] 활동을 통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는데,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학하며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하다 후지시로 제1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이었다. 야스다가 공산당에 입당하자 야스다 밑에서 수학하던 제자들도 대거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들이 1970년대에 중진이 되어 사민계라는 하나의 계파를 구성하게 된다. 사민계는 야스다계, 혹은 야스다가 머물던 나호로 정 (名榥町)에서 딴 나호로계 (名榥系, 명황계)로도 불리운다.

사민계에 이어 지분을 구성하고 있던 계파는 "유럽계"이다. 분쿄 아리토모 (文京有智)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들은 유럽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공산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민파의 보스인 야스다 또한 유럽 유학파 출신이므로, 엄밀한 구분을 위해 "스파게티파", "이탈리아계"로 분류된다.

또 사민계와 유럽계 외에도, 아키시오 적군파를 지지하며 무장혁명으로 "공산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던 무장계, 민족, 언어, 종교를 철폐하고 인류가 세계 단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르네트계, 아나코생디칼리즘을 주장하는 생디칼리즘계도 공산당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세 계파는 모두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치적 타협을 통해 당을 운영하던 사민계, 유럽계와 하루가 멀다하고 충돌을 빚었다.

1977년 9월 15일, 아키시오 공산당 제18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사민계의 야스다 아키히데와 유럽계의 분쿄 아리토모는 물론, 카르네트계의 토요타 타이세이 (豊田大成), 생디칼리즘계 히라무네 카즈오 (平棟和雄) 등이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7] 문제는 과거 야스다와 분쿄가 단일화 약속을 통해 매년 번갈아 대표에 출마하는 것으로 결정해서 당년도에는 야스다가 출마할 차례였음에도 불구, 분쿄가 출마를 고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차피 규모에서 밀려 낙선 당할 것이 불보듯 뻔하다고 생각한 카르네트계, 생디칼리즘계가 분쿄와 단일화를 선언했고, 분쿄는 무난하게 당 대표에 선출된다. 야스다는 이 시기를 두고, 당권을 잡은 유럽계-카르네트계-생디칼리즘계가 사민계를 수정주의자, "국민당 사쿠라" (스파이) 라는 딱지를 붙이며 탈당을 압박했다고 주장한다.

1977년 12월 19일, 지역구 국회의원 예비후보 자격을 당연직으로 얻는 지역위원장 쇄신 명단이 발표되었다. 야스다를 비롯한 사민계 의원들이 지역의원장직을 박탈당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사민계는 크게 반발하였지만, 비사민계는 요지부동이었다. 중립 성향의 타무라 이반 (田村伊磐) 의원의 중재로 명단 조정이 거론되었으나, 비사민계의 반발로 무력화되었다. 결국 야스다를 시작으로 사민계와 중립 성향 당원들이 대거 탈당했고, 탈당한 원내 의원들은 "성찰적 좌파 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 개혁 신당을 창당"한다는 기치 아래 1978년 1월 5일 개혁당을 창당했다.

1980년대

1978년 지방선거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은 68혁명 세대가 몰락하고, 국민당이 "역시 빨갱이들은 안된다"는 매카시즘 프레이밍으로 반공 정서를 퍼뜨리면서 정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개혁당은 정치적 타협과 개혁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강령을 발표하며 기존의 투쟁 혁명 노선 이미지가 강했던 "공산당 색" 지우기에 나섰지만, "개혁당 당원들도 뚜껑을 열어보면 모두 공산당 출신 아닌가",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는 호토리 시로 국민당 대표의 공격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전원이 낙선하였고, 광역자치의원도 7%밖에 획득하지 못하며 위기에 처했다.

야스다 아키히데는 1978년 지방선거의 패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며, 본인 또한 당 대표 사퇴를 표명하였으나 야스다를 대신해 1980년 총선거를 지휘할 중량감 있는 인물이 개혁당에 전무했다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비상대책부위원장을 맡는 형식으로 다시 당직에 복귀하였다.

원내에 23명의 공산당 출신 의원들을 보유하여 교섭단체로서 지위를 유지한 개혁당은, 키노모토 미네히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1980년 총선거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비대위는 당시 재야에 머무르고 있던 사민주의적 명사, 시민운동가, 연예인, 기업인 등 다양한 인물들을 영입하였으며, 기존의 공산당 출신 의원들 중 지역구 실적이 부족한 의원들을 과감히 공천 배제하고 영입 인사들을 전략 공천하는 등 이미지 전환에 나섰다. 비록 몇몇 의원들은 공천 배제에 반발해 민주당이나 국민당(!)에 입당해 표를 분산시켰고, 전략공천된 후보들도 제대로 힘을 못써서 낙선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총 300석 중 무난히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49석을 획득 (지역구 40석, 비례 9석)하는 데 성공했다. 총선 체제 중에 키노모토가 남긴 "진짜는 총선부터" (本番は国選から)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진짜는 OO부터"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키노모토가 대표로 재임한 1984년 총선거에서는 47석을 확보하였다. 이 때 키노모토는 후지시로 도지사 출마를 명목으로 대표를 사임하여, 야스다 아키히데가 대표로 복귀해 1986년 지선을 치르게 되었다. "중규모 야당 대표. 딱 거기까지."라는 언론의 평론을 받던 야스다의 대표 체제였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중규모 야당으로 지내게 되나 싶었는데…… 1985년 신페이 내전이 터졌다.

신페이 내전 이후

내전 정국이 이 당의 운명을 바꾸었다.

1985년, 신페이 제도의 한국인 분리주의자 단체가 심평배달당을 세우더니 심평배달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내전 발발 직후, 영한신문의 한국인 기자들이 당시 최대 정당이던 국민당이 아키시오에서 펼쳐온 한국인에 대한 182개의 인종 차별 정책 및 법령과 1만 개에 이르는 법안, 지방 조례안 작성 사실을 폭로하는 니시이-조희창 게이트[8]가 터지고, 1987년에는 국민당 내각을 쥐락펴락 해온 "짓세이" (비선실세) 존재가 폭로된 짓세이 파동이 터졌다. 국민당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무라노 란 총리가 의회 해산을 제안했지만 의회를 즉시 해산해봐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기 때문에 국민당은 총선이 올 때까지 어차피 망할텐데 버텨나 보자!는 식으로 대응했고, 개혁당은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지키겠습니다, 국민의 아키시오" (守ります 国民のあきしお)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1986년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 때 절대 안 무너지는 보수의 아성이라던 수도권 3개 도현지사직을 모조리 탈환했다.

그리고 1988년 총선거에서 개혁당은, 중도우파 민주당 (유럽 신자유주의파 + 국민당 탈당파 + 한인 온건주의 관동계·영남계), 사회당 (구 공산당 사민계 선도탈당파)과 연립 내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연대하였고, 개혁당이 단독으로 130석을 획득해 47석의 민주당, 38석의 사민당과 연립으로 여당이 되는데 성공한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합당, 민주개혁당 (民主改革黨)이라는 이름으로 총선에 참여했다. 181석을 단독으로 확보하여 최대 여당이 되었으나, 민주당계는 1996년 총선 정국을 앞두고 다시 분당한다.

역대 선거 성적

대통령 선거

총선거

  • 1980년 총선거: 49/300
  • 1984년 총선거: 47/300
  • 1988년 총선거: 130/300 (+ 민주당 47/300, 사회당 38/300)
  • 1992년 총선거: 181/300
  • 1996년 총선거: 193/300
  • 2000년 총선거: 153/300 (+ 사회당 59/300)
  • 2004년 총선거: 110/300 (+ 사회당 97/300)
  • 2008년 총선거: 106/300 (+ 사회당 69/300)
  • 2012년 총선거: 103/300 (+ 사회당 80/300)
  • 2016년 총선거: 88/300 (+ 사회당 49/300)

지방선거

각주

  1. 이 색은 원래 19세기부터 민주당의 상징이었으나 민주개혁당 시절 개혁당의 것으로 넘어왔고, 민주당은 분당하면서 남색으로 색을 바꾸게 된다.
  2. 이후의 역사는 신민주당으로 이어진다.
  3. 직역하면 "아키시오의 개혁자들을 위한 정당". 문법 등을 따지면 "개혁당"이라는 직관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먼 번역이지만, 2001년 영역명을 정한 스기우치 토시야 (杉內壽也) 당시 원내대표는 '아키시오의 개혁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정당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번역했음을 시사했다.
  4. Ideology of Reformer's Party of Akishio, 2017-09-20 확인.
  5. 「省察できる左派」改革党40年迎え, 2017-09-20 확인.
  6. 아키시오 공산당은 1960년 일본 공산당의 지역당 개념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아키시오 공산당을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조직.
  7. 이 때 무장계는 이미 없었다. 무장계는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모방 계획을 꾸미던 것이 드러나 전원 강제 출당되었고, 대다수가 사법처리되며 소멸당했다.
  8. 국민당 내부고발자 니시이 신타로와 최초 폭로자 조희창 영한신문 기자의 이름을 땄다.